book-movie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주먹불끈 2024. 11. 23. 00:04

개요

사내 독서모임의 11월 책으로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좋았기에 추천했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으로 2차 대전이 직,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러시아 여자들의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전체 감상

남자의 전쟁, 여자의 전쟁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다. 장군들조차 전쟁이라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책을…… p28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끼치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 톨스토이, p555 옮긴이의 말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p198

만약 우리더러 ‘암소를 내놓으시오. 그럼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라고 한다면 당장 암소를 내놓을거야! p460

 

3월에 나폴레옹을 읽었었다. 전형적인 전쟁에 대한 이야기라 할만하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어떻게 싸웠는지, 주요 군인들은 누구였는지, 전력은 어떻게 되었고 무기들은 어떠했는지가 나온다.

 

이 책은 다르다. 전쟁에 참전하고 경험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쟁의 경험을 여자들의 감성을 거친 일화들과 생각들로 풀어낸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의 전쟁 이야기들이 많아질수록 인류는 전쟁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최근 보았던 영화 서부 전선 이상없다 도 같은 목적을 가진 영화가 아닐까 싶다. 인류 모두가 전쟁을 격렬히 반대하면 좋겠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전쟁을 소설, 영화, 혹은 먼 나라, 먼 땅의 이야기로 생각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든, 내일이라도 우리 눈앞에 닥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러시아인의 나라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조선 건국을 이뤄낸 정도전이나,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떠올랐다. 정도전은 자신이 꿈꿔온 유교의 이상을 현실에 만들어내었다는 자부심에 전율했을 것이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왕과 귀족이 없는 새로운 나라를 밑바닥부터 하나씩 만들어간다는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공산주의나 좌파에 대한 긍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둬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당시 러시아 민중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오래된 왕과 귀족의 세상을 자신들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혁명을 성공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간다는 자부심이 컸을 것이고, 자신들이 만든 나라이기에 애국심이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그런 마음들 하나하나가 책 속에 스며있다.

작은 이야기들이 전쟁의 전체를 보여준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현대사중 몇몇 에피소드를 형상화하고 싶었다. 단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아니라 집단적 기억을 바탕으로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 민음사, 경이로운 도시 1권, p11

 

이 책은 할머니들의 젊었을 적 기억의 단편을 수 백개 모아놓은 것이다. 할머니들의 기억이 맞는지 교차 검증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역사적 사실과 맞춰보지도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은 이야기들을 읽고 읽다보면 그 전쟁의 전체 그림이 손에 잡힐듯이 보이게 된다. 어느 장군이 어떤 전투에서 얼마의 병력으로 어떤 전술을 펼쳤는지 같은 정보는 얻을 수 없지만, 전쟁의 전체를 보게 된다.

인상깊었던 부분들

증오

우리는 포로를 붙잡아 부대로 끌고 갔어…… p46

나는 운전병이라 포탄 상자들을 운반했어. 운전을 하고 가면 죽은 독일군 병사들의 두개골이 차바퀴에 까려 바드득바드득 부서지는 소리를 냈어…… 뼈도 으스러지고…… 너무 행복했지…… p84

 

위 내용을 낭독하려 한다. 독일군에게 가족을 잃은 러시아 병사가 증오로 똘똘뭉쳐 독일군 포로들에게 복수를 한다. 그래서, 통쾌한 것이고, 정의가 실현된 것인가? 애초에 전쟁이 없었으면 어떠했을까? 독일의 젊은이와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서로의 나라로 여행을 가거나, 교환학생으로 서로 공부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누가 이들을 싸우게 하고 누가 이들을 서로 죽이게 만들었을까?

동물

ㅡ 왜 그래?
내가 물었지
ㅡ 망아지가 불쌍해요
신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어. p78

우리는 문을 열고 부상자들이 기차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왔어. 그런데 부상자들이 기차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불길에 휩싸인 말들을 구하러 달려가는 거야. p247

‘어떻게 사람이 돼가지고 말들이 보는 데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었지 p248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토리노의 말

웃을 수 없음

‘이렇게 끔찍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고 어떻게 기뻐할 수 있지? p96

나는 갈랴 코로브키나와 친하게 지냈어. 갈랴는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친한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아이마저 밤에 살해당했고, 나는 그곳에서 웃음을 잃어버렸어. 다시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웃을 수 없게 됐지…… p322

 

한강의 소년이 온다 - 에는 분수대를 틀지 말아달라는 민원이 떠오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여고생들을 낙엽만 떨어져도 웃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생을 살다 제대로 힘든 일을 겪고나면 더 이상은 그렇게 웃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하물며 전쟁을 겪었다면야.

엄마, 부모

우리 엄마는 무척 엄격했어. (중략) 그런데 그런 엄마가 기차로 막 달려오는 거야. 와서 내 머리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췄어. p104, p105

남편은 막내를 품에서 떼놓지 못하고 그대로 안은 채 정렬했어…… 군인 한 명이 남편에게 소리소리를 지르는데도 남편은 아이를 안고 눈물만 펑펑 쏟았지. p459

 

이 부분도 낭독하고 싶다. 평생 안경을 쓴 사람을 보아왔고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는데 둘째가 초등 1학년에 안경을 쓰게 되니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책에서 나오는 많은 엄마의 심정을 나도 이해한다.

마더

잠시 후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디 당신 아들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는 걸 아셨어. (중략) ‘아이고 내 새끼들! 너희 어머니들은 너희들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땅에 묻히는 것도 모르는데! (중략) 내 새끼들아…… 불쌍한 내 새끼들아……’ p487, 488

 

봉준호의 마더

사람

나는 행복했어…… 내가 다른 누군가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뻤어.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게 스스로도 많이 놀랐지…… p157

올바른 치료법

하지만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고 싶다면, 또 살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해요. 결혼해서 될 수 있는 한 아이를 많이 낳아요. 그 방법만이 당신을 살릴 수 있어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당신 몸도 그만큼 회복 될 거요. p266

 

논리적 설명은 못하겠다. 올바른 치료범임은 알겠다.

잘생김

전투가 끝나고 그 독일 병사들이 있는 데로 가봤어요. 시신이 되어 누워 있더군요.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 않아요…… 한 명은 아주 잘생긴, 젊은 독일인이었어요…… 비록 파시스트였지만 마음이 아팠죠…… p281

 

워낙 처절한 이야기들의 연속이고 이 이야기도 웃을 수 만은 없는 장면이지만 잘생기니 그나마 적군의 마음을 아프게라도 하는 구나 싶어서 밑줄을 그어두었다.

첫 입맞춤

그 사람과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이 되자……나한테 그러는 거야. ‘네가 먼저 해!’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 그러니까…… 다들 내 사랑을 알고 있었던 거야. 모두 다…… (중략) 갑자기 미치도록 행복한 거야. 그 삶도 알았을 지 모른다는 그 생각에. 혹시 그 사람도 나를 좋아했다면? p426

 

p425-427의 류보피 미하일로브나 그로즈디 위생사관의 첫 입맞춤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는 단편소설을 읽은 듯 했다.

반응형